기술이 돈이 되지 않는 나라, 정부 기술유출 방지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경기도 ‘기술 유출 방지 업무협약’ 체결, 국정원·공공기관·경제단체 손잡았다 중기부·특허청·지자체까지 나서도 여전한 기술 유출 피해, 근본적 원인에 주목해야 척박한 기술사업화 환경, 내 기술로 ‘돈’ 못 버는 현실에 외부 판매 선택하는 연구자들 기술 유출 ‘악순환’ 끊어내려면 혁신 기술이 날개 펼칠 수 있는 국내 환경 조성해야

사진=중소기업기술보호울타리

경기도가 중소기업 보유 기술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국정원, 경기도 공공기관, 경제단체와 함께 협력관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염태영 경기도 경제부지사는 8일 경기도청에서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중소기업 산업기술 보안 역량 강화와 기술 유출 방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지난해 4월 체결한 ‘경기도(북부) 중소기업 산업기술 해외 유출 방지 업무협약’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한 것이다. 협약에 따라 이들 기관은 협력 관계 구축과 더불어 상호 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는 등 중소기업 기술 보호 활동에 힘을 모으기로 약속했다.

한편 업계에서는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지원책을 내놓기 전에 기술 유출이 발생하는 본질적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수많은 정부 지원 사업에도 불구, 기술 유출 문제가 꾸준히 반복되는 이유는 결국 우리나라의 척박한 기술사업화 환경 및 기반 부족에 있다는 지적이다.

경기도 산업기술 유출 방지·피해구제 방안 마련

국정원이 최근 5년간(2018~2022) 적발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은 총 93건이며, 기업 피해 추산액은 25조원에 달한다. 실제 적발되지 않은 유출 건수를 고려하면 기술 탈취가 산업 전반에 끼친 피해 규모는 한층 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경기 남부는 반도체 클러스터, 미래 자동차, 인공지능·빅데이터 등 전략적 핵심 기술 산업군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 만큼, 산업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방책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경기도는 국가정보원 지부장, 이상창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임문영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경제 부문 상임이사, 유동준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차석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 김식원 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역본부 경기중소기업회장, 서석홍 경기도상공회의소연합회장, 이원해 경기중소벤처기업 연합회장, 이대표 경기도수출기업협회 명예회장과 ‘중소기업 산업기술 보안 역량 강화와 기술 유출 방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차후 △중소기업 산업기술 보안 실태 점검 및 보완 방안 자문 △산업기술 유출 사전 예방 활동과 지원에 관한 협력 방안 △산업기술 유출 발생 시 침해 조사 및 조치 대응 지원 △산업기술 유출 신고 채널 구축 △실무협의회 구성과 운영 △정보공유 및 활성화 방안 등 중소기업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사업을 공동 추진할 계획이다.

앞으로 경기도 소재 중소기업은 협약기관을 통해 언제든 ‘기술 보호 활동’을 신청할 수 있다. 차후 공공기관과 경제단체는 첨단산업 지원, 피해 접수, 기술 침해 동향 파악, 홍보 활동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산업기술 해외 유출 예방과 사후 피해 복구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국정원은 2003년 설립된 ‘산업기밀보호센터’를 주축으로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 차단을 지원하고, 경기도,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 등과 함께 희망 기업을 방문해 맞춤형 컨설팅(자문)을 진행한다.

사진=중소기업기술보호울타리

중기부의 ‘기술 보호 지원사업’

현재 정부 차원에서도 기술 보호를 위한 광범위한 지원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기업 기술 보호울타리 ‘기술 유출 방지시스템 구축지원’ 사업을 통해 우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기술 유출 가능성을 정밀 진단하고, 기업 환경에 적합한 보안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중기부의 대표적인 기술 보호 제도로는 ‘기술자료 임치제도’가 있다. 기술자료 임치제도는 핵심 기술을 기술보증기관 등 제3의 기관에 안전하게 임치하고, 기술 유출이 발생했을 경우 임치한 기술의 보유 사실을 입증하는 제도다. 생산·제조 방법, 설계도, 성분표, 데이터, 디지털 콘텐츠, 경영상 정보 등 광범위한 자료가 임치 대상에 포함된다.

분쟁 발생 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또 다른 제도로는 기술보증기금의 ‘증거지킴이(기술자료 거래기록 등록시스템)’가 있다. 중소기업은 계약 체결 이전 대기업으로부터 구두 혹은 유선상으로 기술 자료를 요구받는 경우가 잦은데, 이 과정에서 은밀하게 기술 유출·탈취가 발생하곤 한다. 증거지킴이는 기술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증거 자료(이메일, 녹취록, 거래일지 등)를 등록하고 향후 분쟁 시 소송 증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기술 유출 사전 예방을 위한 기업의 보안 시스템 구축도 지원한다. 중기부는 △회사 내 보안장비에 해킹, DDoS 등 이상 징후를 실시간 모니터링해 신속하게 탐지 및 대응할 수 있는 보안관제서비스 △기업 내부자에 의해 중요 자료가 유출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내부 정보 유출 방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악성코드 랜섬웨어 탐지 서비스 등을 무상 제공, 기술 유출 예방 및 감시 체계를 구축한다.

이 밖에도 △기술 보호·법률 전문가 자문 및 상담 △중소기업 기술 침해 신고·조사 △신속한 피해 구제와 법적 대응을 위한 중소기업 기술 분쟁 조정·중재위원회 운영 △법무지원단 매칭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이 중소기업 기술 보호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출처=중소벤처기업부

유명무실한 정부 지원, 원인은 척박한 기술사업화 환경?

중기부뿐만 아니라 특허청 등 다양한 부처에서도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에는 특허청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 시행계획」을 의결했다. 영업비밀 유출 방지를 위한 사전 예방 강화, 영업비밀 유출에 대한 대응 역량 제고, 영업비밀 보호 기반 구축 등이 계획의 골자였다. 중소기업보호울타리의 기술 보호 지원사업, 경기도의 기술 유출 방지 업무협약과 사실상 유사한 접근 방식이다.

수많은 정부 지원책이 쏟아졌지만, 기술 유출 피해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에 시장에서는 단순히 기술 유출이라는 ‘현상’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근본적 원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내부자들이 시장에서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을 왜 외부에 유출하는 것일까. 기술을 내부에서 사업화하면 훨씬 큰 금전적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업계에서는 연구자가 기술을 해외 등에 ‘팔아넘기는’ 현상의 원인이 우리나라의 척박한 기술사업화 환경에 있다고 지목한다. 연구에 매진해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국내에서 기술의 가치를 인정받고 성공적으로 사업화하기는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다. 기술 유출은 결국 척박한 국내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기를 포기한 이들의 선택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기술경쟁력이 국가의 위상을 좌우하는 기술 패권 시대가 도래하자, 정부 혁신 부처들은 기술사업화 지원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술사업화가 혁신 기반 성장의 중심축으로서 그 역할과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산업부, 과기정통부, 중기부 등은 부처의 기능에 부합하는 기술사업화 지원 사업 추진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법제와 전문 기관 조성에 힘써왔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 기술사업화가 창출하는 가치에 비해 관련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기술사업화 관련 부처 예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지만, 절대적 규모에 있어 정부 R&D 예산 대비 낮은 수준이다. R&D에 예산을 쏟아부어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이를 상품화하고 이윤을 창출할 기반이 부족한 기형적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출처=과학기술정책연구원

기술사업화 기반 약화는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정부출연연구기관에는 기술사업화 조직(TLO)이 별도로 존재한다. 전문 인력을 통해 출연연 성과의 기술이전 및 사업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지원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TLO의 조직 규모 및 예산은 2017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 2017년 소관 출연연의 전문 인력은 163명, 전담 인력 231명, 예산은 839억9,500만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2021년 들어 전문 인력은 123명, 전담 인력은 195명, 예산은 770억2,300만원까지 감소했다. 기술사업화 관련 인력과 할당 예산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의 원인으로는 잦은 정책 변화, 예산 부족 등으로 인한 역량 및 인식 악화가 지목된다. 혁신 기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기꺼이 사업화 기회를 제공하는 국내 VC가 사실상 극소수라는 점도 문제다. 연구에 힘을 쏟아 혁신 기술을 개발해도 사업화로 매끄럽게 이어질 수 없는 환경인 셈이다. 이로 인해 꾸준히 전문 인력이 이탈해 기술사업화 과정 자체가 침체하고, 재차 예산과 인력이 감소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업계에는 국내에서의 기술 개발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기술사업화를 시도할 때 무리 없이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고, 기술 이해도가 높은 VC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어떨까. 스타트업 설립 등 얼마든지 기술을 활용한 도전이 가능하고, 자신의 기술을 활용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막대한 기술 유출 피해가 발생할까.

모두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혁신 기술이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수년에 걸친 정부 지원 사업에도 기술 유출 피해가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 같은 구조적 문제에 있다.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단순 기술 유출이라는 ‘현상’만을 바라보고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국내에서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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